조선 전기 여성 예술가, 순창 설 씨 부인과 권선문첩의 유산
잊히지 않은 이름, 설 씨 부인
조선 전기 여성의 이름은 대부분 역사 기록에 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순창 설 씨 부인은 예외였습니다. 그녀는 1429년(세종 11)에 태어나, 조선 성종 대(成宗代)를 살았던 인물로, 문신 신말주(申末周)의 부인이었습니다. 학덕과 인품이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으며, 특히 문장과 그림에 능했던 여성 예술가로 전해집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존재를 오늘날까지 증명하는 것은 「권선문첩(勸善文帖)」입니다. 이는 현재 보물 제7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한국 여성 예술사의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권선문첩, 붓끝에 담긴 선의(善意)
1482년(성종 13), 전북 순창 강천산에 위치한 강천사(剛泉寺)가 중창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사찰 보수를 위한 시주가 필요했을 때, 순창 설 씨 부인은 직접 권선문을 작성했습니다.
- 형식: 14편의 권선문과 2점의 채색 불화.
- 내용: 불교 신도들에게 시주를 권하며, 선을 행하고 공동체를 위한 마음을 가지도록 독려.
- 의의: 단순히 기부를 권유하는 문서가 아니라, 여성의 문필과 화필이 공식적으로 남아 전해진 드문 사례.
- 이 권선문첩은 서예, 회화, 문학, 종교가 한데 어우러진 복합 예술 작품이자, 여성의 목소리가 공동체를 움직인 역사적 증거로 평가됩니다.
여성 예술가로서의 도전
조선 전기의 사회는 여성의 공적 활동을 극도로 제한했습니다. 여성은 규방에 머물며 이름조차 역사에 남기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설 씨 부인은 단순히 집안의 안주인이 아니라, 공동체와 예술, 종교를 연결한 다리였습니다.
그녀의 작업은 다음과 같은 가치가 있습니다.
- 문학적 가치: 한문으로 작성된 권선문은 당대의 문장가에 견줄 만큼 유려하고 단정합니다.
- 예술적 가치: 첨부된 불교 채색화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메시지와 어우러진 예술적 장치입니다.
- 사회적 가치: 여성의 이름으로 공적 권선문이 작성되어 보존된 것은, 여성의 사회 참여 가능성을 보여주는 드문 사례입니다.
신사임당보다 앞선 세대
우리는 흔히 조선 시대 여성 예술가로 신사임당(1504~1551)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순창 설 씨 부인은 신사임당보다 약 70년 먼저 활동한 인물이었습니다.
- 신사임당이 개인적 예술성과 자녀 교육을 통해 가문 내 예술가의 역할을 보여주었다면,
- 순창 설 씨 부인은 공동체와 불사를 위해 예술과 글로 직접 참여했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문화재로서의 현재
오늘날 권선문첩은 단순한 옛 문서가 아닙니다.
- 조선 전기 여성 예술의 존재를 증명하는 희귀 자료.
- 불교사·지역사·여성사 연구를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다층적 자료.
- 여성의 목소리가 단절되지 않고 오늘에까지 이어진 상징적 유산.
문화재청은 이를 보물로 지정하며, “조선 전기 권선문 중 희귀한 사례이며, 여성의 필치와 글씨가 보존된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습니다.
퓨처셀프적 성찰
퓨처셀프(FutureSelf)의 시선으로 본다면, 순창 설 씨 부인이 남긴 메시지는 단순히 불교적 권선이 아니라, **“예술과 기록은 미래의 나를 향한 목소리”**입니다. 그녀의 붓끝은 500년의 세월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작은 글과 그림이라도,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역사가 된다.
순창 설 씨 부인(1429~1508경)은 조선 전기의 여성 화가이자 문인으로, 「권선문첩」을 통해 공동체와 종교, 예술을 잇는 다리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기록은 여성 예술가가 단순히 존재했음을 넘어, 공동체 속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음을 증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녀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것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사라진 여성 예술의 숨결을 이어 미래로 전하는 일입니다. 그녀의 권선문처럼, 작은 기록 하나가 세대를 넘어 울림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영감을 줍니다.